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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_살림살이'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1/05/16 씽크카페 컨퍼런스@대화 속으로~ by 태다미 (2)
  2. 2010/06/19 Design for All by 태다미
  3. 2010/05/19 다큐 '당신과 나의 전쟁' by 태다미
  4. 2010/04/10 [담기]김예슬 vs 故 박지연 vs 천안함 희생자…공통점은? by 태다미

멀~~리 제주도에 계시지만 페이스북으로 컨퍼런스를 소개해주신 조아신님 덕분에
즐거운 모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즐거운 모임이라 얘기한 것은
1부는 신영복 선생님, 박웅현님, 더숲트리오, 조국교수님, 김여진님의 발표가 있었지만 
2부는 주제별로 테이블에 모여 떠들고, 결정하는 즐거운 시간이 있었기때문이다. 

씽크카페컨퍼런스@대화- 우리가 함께 결정할 미래에 대한 이야기 

컨퍼런스를 다녀와 이곳저곳에서 모임 이야기를 나눴는데~ 
미리 알려줘 같이 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제주도 조아신님과 네트워크는 잘 되었지만 주변 사람들도 다 알 줄 알고, 나누지 못한 것에 반성하며^^;;;
다음에는 잘 알릴께요~~~

방아골 동료 희경샘과 함께 참석하며 
이런 좋은 강의도 좋지만~ 
동네에서 이야기들이 실현될 수 있는 모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동네 활동가, 동네의 이야기 자리에는 20대, 30대가 거의 없다는 아쉬움도 이야기 해보며~^^;;

1부 시간에는 잘 몰랐는데~
2부 대화세션에 가니 도봉구 선배들이 많~~~이 계셨다. 

창림샘, 희정샘, 이강오 선생님, 김연순 선생님~ 
멀~~리 금천구에 가서 동네분들을 뵈니 더 반가운 마음^─^


이야기 1)
신영복 선생님은 그 간 책에서 보여주셨던 글귀와 삽화로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내주셨다~
인상깊었던 그림 중 하나는 
신호등 그림! 

[빨, 노, 좌회전 표시, 초]

신호등이 보여주는 것처럼  한국사회에서는 좌회전 하기가 어렵다는~^^;; 

그리고~ 부딪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라는 글귀도 인상깊었다~! 
전문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쉽지만... 누군가에 후기에 있겠지^^ 

늘상 강조하셨던 
하방 연대/ 역사는 변방에서 시작된다는 것. 

그리고 지남철의 떨림처럼 
고내하고, 전률하는 삶을 잃지 말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추천해주신 책은 [분노하라] 곧, 출간 된 것이라고 하는데~ 프랑스 레지스탕스 경험하신 어르신의 저서. 
평화적으로 붕괴하고~
저항이야말로 창조 그 자체라는 내용이 담겨있다고 한다.


이야기 2)
박웅현 선생님의 "공존"에 대한 이야기. 

이전에 체인지 온에서도 뵌 것 같은 기억이^^;; 

가치와 이야기가 담긴 광고를 제작하며 자연과 소통하고, 사람과 소통하고~
자연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계신 듯 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분야인 "광고"를 위해 
다양한 인문학적 배경, 사회 현상에 대한 이해, 성찰을 끊임없이 하고 계신 듯함을 엿볼 수 있어 인상깊었다. 
여러 책 이야기를 주제에 맞춰 이야기 해주셨고~

"만물은 서로 부딪히며 존재한다"는 동양 사상, 
그리고 본인은 "어떻게 하면 잔디가 자라나는 속도에 맞춰 살 수 있을까?" 고민하신다며
홍익인간이 아니라 "홍익생명"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이야기 3) 노래 이야기- 더숲트리오

문화공연 순서로 성공회대 교수로 구성된 더숲트리오의 노래가 이어졌다. 
아름다운 사람- 뭉게 구름- 북한에서 작곡된 노래 -너와 나의 땅 이라는 노래들로 이루어졌다. 

아~~~ 나도 이렇게 노래하는 밴드?를 해봐야지^^ㅋ 

스피커의 상태가 좋지 못했지만 
음색과 전달력, 가사의 의미들이 참 좋았다!!!
그리고, 무대매너들도 좋으셨다는~ 위트있는 3분의 이야기도 참 재미났다.


이야기 4)
조국 교수님의 "정의"에 대한 이야기

전공 분야인 "법치"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풀어가시며
최근 한국사회에서 뜨는 "정의"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를 해주셨다.

중간중간 삽화와 재치있는 이야기들은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무엇보다 조국 교수님 외모를 통해 "안구정화의 시간"까지 보너스로 받으며~^-^ ㅎㅎㅎ

발표 뒷 부분에 인상깊었던 이야기는


- 존롤즈의 "정의에 대한 두 원칙"
1) 차등의 원칙- 빈민에게 최대 이익 주는 불평등은 OK.
2) 기회의 균등 + 삶의 기회까지 평등해야 한다. (최소 수혜자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함.)
  => 복지와 정의는 떨어질 수 없나보다^^;; => 이 건 내 생각~ㅋ

- 중도파 대법관인 벤자민 카조도의 이야기 
재임 중 중립적으로 판결했다 생각한 것은 강자에게 기울어진 판결 이었고,
약자에게 유리하게 판결한 것은 훗날 보니 중립적인 것이었다.

관련 기사: 조국 교수가 말하는 정의 - 약자에게 유리하게
http://kafkago.tistory.com/416


이야기 5)
배우 김여진이 말하는 행복에 대한 시간이었다.

"행복해 보이기" VS "행복해지기"

인생의 대부분을 다른 사람에게 행복해보이기 위해 집도, 직업도, 자녀들에 대한 것도
신경쓰고 사는 것은 아닌지 물으며
남에게 보여지는 행복이 아닌 자신이 그리고 나의 행복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행복해지자는 이야기를 하며~

트위터로 시작된'날라리 외부세력' 모임의 이야기와 활동을 풀어냈다.

홍대 청소노동자 아주머니들을 만난 이야기, 조선일보에 기사 낸 이야기, 홍대 청소노동자들을 통해 날라리 외부세력이
나만 행복하려는 아이의 마음에서 함께 책임지고, 함께 행복해지려는 어른의 마음을 배운 이야기,
한진중공업 노조, 제주도 강정마을에 직접 찾아가 함께 한 이야기 등등~

관련 기사: http://v.daum.net/link/16681070

무거운 마음으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만큼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한 가지씩 하자라며 이야기를 마무리 했다.

배우라는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멋지게 세상과 소통하고 연대한... 우리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들려줘 인상깊었다.

사회적으로 신망깊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소신있는 발언과 연대를 위한 소신있는 행보가 많이 이어지면 좋겠다.
이미 그런 분들도 많겠지만~!

이렇게 발표 시간은 마무리 되었고,
2부 순서로 대화세션이 이뤄졌다. 모여서 떠들며 결정하자!

20개 정도의 테블에서 20개의 주제로 이뤄졌고, 난 평소 그리고 최근에 관심사인 "먹을거리" 테이블에 참여했다.

사전 참여신청을 했을 때에는
먹을거리와 건강이라고 하여 즐겁게 신청했는데~
추후에 보니 집밥과 밥상머리교육의 의미라 하여 관심사와 조금 멀어져 다른 테이블에 갈까 했지만
먹을거리와 복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 곳에서 나누는 것도 큰 의미가 있겠다 생각하여 참여하게 되었다.

테이블 호스트로는 음식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셜벤쳐 푸릇 실장이신 노민영 선생님이셨고,
연세대 학생, 커뮤니케이션 우디 선생님들, 통일운동본부 선생님, 볼룬티어21 선생님, 성공회대 대학원 선생님,
SK계열사에서 농민들을 만나고 계신 선생님 등
함께 모여 즐겁게 떠들고~ 각자의 고민과 그간 먹을거리에 대해 고민하고, 찾아보고, 배우고, 경험한 것을 나눌 수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떠들었다!!
결정하는 시간에는 교육과 정책에 대한 제언으로 마무리 했다.

무엇보다 각각의 테이블에 맛난 간식거리, 먹을거리가 가득하여
함께 먹으며 즐거운 이야기를 나눠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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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태다미

모두를 위한 디자인!
출근 길 버스를 타고 가며 승차하는 사람들을 보며 떠올랐다. 

한 아이가 버스를 탈 때 "초등학생이요~" 이야기를 하고,
기사분은 할인된 금액을 입력한 후 아이는 카드를 기계에 댄다. 
버스를 탈 때마다 아이가 불편하지 않을까?
기계 자체는 일반인이라는 성인에게 맞는 요금으로 기준이 되어 있고~ 

우리 주변을 구성하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어쩌면 모든 것들이 
보통 사람, 일반인 기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보통사람, 일반인이라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활동을 참여하는 사람들로 맞춰진 것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 이면에는 다수의 편함을 위해 소수의 불편조차는 무시한 채 가는 것이 아닐까?
비슷비슷한 다수를 위해, 조금 다른 소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무시하는...

물론, 요즘은 어린이카드, 청소년카드, 일반용카드, 경로우대용 교통카드 등 
구별된 것이 있어 그 것을 사용하면 말하지 않아도 쉬이 해결이 가능하겠지만... ....
모두를 위한 디자인, 유니버설한 디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2004년 사회복지 실습을 할 때 
"유니버설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처음 알게 되었다. 
 특정 계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연령, 능력에 관계없이 모두가 쉽고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디자인.
그것이 유니버설 디자인이었다.

한국에도 몇년 전 저상버스가 도입되었지만...
여전히 장애인이 비장애인처럼 불편없이 생활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물론, 기술의 발달로 세상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고 어르신들이 늘 말씀하시지만... ...
기술 이전에 생각, 관점, 배려가 먼저이지 않을까?

지하철을 탈 때마다 나는 가끔씩 생각해본다.
그 많은 장애인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장애인이 없어 보이지 않는 것일까?
하루에 만나게 되는 장애인들은 얼마나 될까?
장애인복지관에서 근무한다면 온 주변이 장애인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일상에서는 그렇지 않다.

부모님의 장애로 남보다 일찍 그런 생각들에 눈과 귀가 열렸을지도 모른다.
우리 엄마, 아빠가 편안하게 탈 수 있는 자동차~
다른 사람들처럼 자유로이 버스와 기차를 타고 여행가는 것~
특별할 것 전혀 없는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오랜 외침으로 얻어지는 작은 변화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오래된 외침 이전에는
더 오래되고, 깊은 의식의 차별과 차별의 눈짓이 있다는 것이다.
흔히 몸이 불편한 사람, 소득이 없는 사람 등등을 마주하며 "자격지심"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왜곡된 사고를 하는 것은 아닐까? 또는 너무 연약한 척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 것을 이해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자연스레 터득하고, 나타나게 되는 반응은 아닐까 생각 되어지기도 한다.
물론, 장애의 유무, 소유의 유무를 떠나 자격지심이나 왜곡된 사고는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그럼, 사회복지사인 나는 "모두를 위한 디자인"을 내 일상에서, 내 일터에서 어떻게 실현하며 살아야 될지 생각해본다. 누구나 사용가능한 건물 등으로 바꾸는 일은 어려울지 몰라도...
"소셜 디자이너"라는 말도 있듯이(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함께 살아가는 동네를 만들기 위한 사회를 바꾸는 일을 하는게 아닌가 한다.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차별하지 말자."
"어르신들을 공경하자."
 목이 쉬게 외치면 언젠가는 변화될까?
그 것도 한 방법이겠으나 사회복지사인 나의 태도, 생각, 언어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어야 겠다.
사회복지현장에서부터 만나는 주민들을 어렵고, 부족하고, 불쌍하고, 가난한 존재로 계속 만드는 한
이 사회의 어려운 사람에 대한 이미지도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현장에서 만나는 한분 한분을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는 것부터 시작이지 않을까?
사업비 주는 구청이 최고의 귀한 손님이 되고, 
복지관을 찾아주시는 어르신들이 하찮고, 귀찮은 손님이 된다면
과연, 어디에서 사회복지 철학을 찾게 될 수 있을까?  

복지관에서 어르신들을 만나 이야기 나눌 때
어르신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무시를 당하는 이야기를 수없이 듣게 된다.
약하기에 배려받을 수는 없는 걸까?
물론, "약하다"라고, 고정되어 생각하는~ 강점을 보지 않는 것도 실수이겠지만... 사회적 약자라는 말이 있듯이 
그런 말을 만들었으면 그에 맞는 배려도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 하지만... 
인간 자체, 생명 그 자체에 대한  평등과 소중함이 인정되고~ 
나이와 배움, 부, 성별과 상관없이 존중받게 되길! 
또 약함을 약함으로 고정관념하여 무시하기 보다는 도움이 필요한지 물으며 배려하고, 존중한다면 
차별의 서러움과 아픔은 조금이나마 씻겨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도 대학시절 최고의 배움이었다 생각되는 한 강좌 
"생명문화와 의학윤리" 
카톨릭재단 대학교여서 이런 강좌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수사로 생활하시는 의사 수사님의 강의였는데... 
죽음의 문화로 뒤엎인 세상에 생명문화를 심는 것에 대해 알려주셨다. 
신이 왜 장애인을 만드셨는지에 대해서부터, 다양한 생명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지금은 그 하나 하나가 고스란히 떠오르지는 않지만... 
참 기억에 남는 강의였다. 

물론, 하루에도 몇번씩 나의 생명에 대한 무지와 배려없음을 느끼고 있지만... 
나의 작은 배려가 누군가의 삶을 아주 조금이나마 행복하게 만들 거라는 긍정의 착각을 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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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태다미
방아골 노조에서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공동체 영화상영을 하
쌍용자동차 투쟁기인 '당신과 나의 전쟁'을 보았다.

최근 주말에 여유가 있으면 다큐를 보곤 했다.
'나의 마음을 지지 않는다.'- 조선인 위안부 송신도 할머니의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10년간의 재판을 다룬 이야기,
'디어 평양'- 재일 교포인 딸이 북한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아버지의 삶과 북한으로 간 오빠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

송신도 할머니의 이야기를 보면서 그 당당한 기세와 어려움도 웃음으로 바꾸는 삶의 지혜가 인상깊었다.
그 어린 나이에 그녀가 겪은 인생은 얼마나 고달팠을까...
전쟁이 있는 곳에는 많은 여성들이 이름도 없이 희생되고...
그로 인해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 또한 참 안쓰럽고, 그 무게를 고스란히 한 평생 가져가야 하는 것도
서글픈 일이다.
다행이도 송신도 할머니 곁에 일본인들로 구성된 지원모임이 있어 10년동안 우직하게 싸워가는 모습이 참 멋있었다!

디어 평양을 보면서는 나 또한 우리 부모님의 삶을 다큐로 담아보고싶다 생각했다.
어느 누구의 삶인들 소중하지 않은 삶이 없기에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그 귀한 인생을 이야기로 담으면 좋겠다.
북한을 조국으로 여기며 한 평생 사신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 조국 북한으로 보냈지만
딸에게는 국적에 있어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둔 것이 참 인상깊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게 하는 것(두 아들을 북한으로 보낸 것) 또한 아버지의 마음이고,
사상과 반하여도 자식이 원하는 대로 살기 바라는 것(딸이 조선, 한국, 일본 국적 중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도
아버지의 마음일 것이다. 
사상으로는 강하지만 인간적으로 참 귀엽고, 정겨운 아버지의 모습이 가득했다. 

쌍용자동차 투쟁기를 그린 '당신과 나의 전쟁'
제2의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그 무시무시한 모습들... 
단지 올바르게 살아가려는 것뿐인데, 힘이 없는 자들에게는 자본으로 엮인 모든 세상이 등을 돌리는 것 같아 마음이 
시렸다.  
혹자는 돈벌이 중에 있는 노동자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파업하는 게 아니냐고 하지만... 
회사의 불합리함에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최후의 외침이 파업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쌍용 자동차 노동자들의 인생을 바꾼 2009년!
누군가는 산자로, 누군가는 죽은자로 그렇게 70여일을 넘게 쌍용의 섬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이미 그 전에 일어났던 일들, 누군가에게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들~ 
그 누군가는 당신이기도 하고, 나 이기도 한 우리의 일상! 

제목에 나온 '전쟁'이란 단어처럼 
쌍용 자동차 투쟁 현장은 마치 전쟁터를 연상시켰다. 
전쟁의 논리, 힘의 논리는 과연 이 땅에 언제까지 악착같이 붙어있게 될 것인가... 

내가 본 3편의 다큐 모두가 '전쟁'이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하는 영상이기도 했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외치는 송신도 할머니의 모습!
남북 전쟁 이후 통일되지 않은 땅에서 재일교포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국적!
경찰이 쌍용자동차에 뿌린 체류액, 잔인한 행동들, 무방비 상태의 노동자를 방망이과 방패로 짖이기는 대한민국 경찰들의 모습이라... .... 전쟁을 방불케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다시 곱씹어 본다. 
옳고 그름을 무시한채 대세에 편승하여 기득권을 누리는 삶이 아니길!
생명이라는 무게가 사람에게도 저 흐르는 강에게도 동일하다는 것을 몸으로 사는 삶이었으면 하리라!
자본의 논리,  힘의 논리 내가 인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내 삶에 많이 파고들고, 흐르고 있겠지만은
깨어있는 눈으로, 깨어있는 마음으로 분별하며
그러나 모나게 나뉘지 않고 살아가면 좋겠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 영화 내내 내 머리속을 멤돌았다.
자본의 논리 아래서는 사람도 돈으로 간주되는 현실... ...
윗사람이 사고치고, 힘 없는 노동자들이 수습하는 아니 짤리는 판국... ...

사회복지 현장에서 노동자의 위치도 생각해본다.
사회복지를 위해 일하면서도 복지를 누리지 못하는 사회복지사들의 현실... 사회복지 종사자들의 현실...
좋은 일, 착한 일 하는 사람들에게 노조는 무슨 노조냐고 물으신다면, 노동자의 권리는 무슨 권리냐 하신다면...
복지사업으로 생색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마땅한 목소리 내는 행동일뿐이라고!
일은 우리가 하고, 꿀은 자기들이 가져다 인기몰이 하는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단결의 힘이라고!
약자들, 우는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복지 종사자들이 나와 우리를 지켜내는 방법의 하나라고!!!

집행, 투쟁, 시위~
표현 자체가 투막하고, 위협적일지는 몰라도
함께 잘 살기위한 외침이라는 것을 왜 모를까... 왜 곡해할까...

함께 살아가야 할 세상인데,
서로가 있어 즐거워야지 적대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이 땅의 많은 아픔들에 위로가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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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태다미

[기고] 대학생 문제인가, 20대 문제인가

기사입력 2010-04-09 오전 10:00:49

나는 현재 이른바 '20대 담론'이 한계에 다달았다고 생각한다. 그 위기는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명목상으로는 '20대 문제'지만 전체적인 프레임은 '대학생'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그 결과 대학생이 아닌 20대가 소외되고 있다. 둘째, 그 과정에서 아직 사회적으로 미성년자 취급을 받는 대학생이 20대를 위한 일종의 '시혜적' 정책을 요구하는 쪽으로 방향이 잡혀 가고 있다. 셋째, 앞서 말한 두 가지 문제가 종합되어, '20대 담론'이 사회 보편의 문제로 인정받고 자리 잡는 일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한 가지 특징적인 사례 비교를 통해 이 지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지난 3월 10일, 고려대학교 3학년 김예슬 씨가 학교 안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여 '자발적 퇴교'를 선언했다. 대학생이 뭔가 '젊은이'의 패기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사회적 수요와 맞물려 이 선언은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경향신문>은 바로 다음날 1면의 일부를 할애하여 이 소식을 보도했고, 여러 사회적 명사가 지지와 격려의 뜻을 표했다. 서울대학교 08학번 채상원 씨는 김예슬 씨의 선언에 동참해 자신도 대학과 싸우겠다는 뜻을 표했다. 이 역시 <프레시안>을 비롯한 여타 언론을 통해 기사화되었다.

한편, 지난달 31일,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반도체 검수 업무를 맡았다가 백혈병에 걸린 뒤 2년간 투병 중이었던 박지연 씨가 2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삼성의 눈치를 보는 대부분의 언론은 이 사건을 다루지 않고 넘어갔지만, <프레시안>을 비롯한 이른바 '비판 언론'은 사태의 추이를 비교적 면밀하게 추적·보도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필자가 살펴본 바로는, 박지연 씨의 문제를 '20대의 문제'로 바라보고 다룬 기사는 없는 듯하다. 박지연 씨의 투쟁과 사망을 다룰 때, 그가 2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는 엄연한 사실은 동정의 소재가 될 뿐이다. '꽃다운 나이에 스러진 비윤리적 기업의 희생자'로 묘사될 따름이었다.

그는 '노동하는 젊은이'가 아니라 '젊은 노동자'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20대에 대한 과도한 예찬과 기대와 비판에 사용되는 온갖 수사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대신 노동조합을 허용하지 않는 삼성에 대한 비판과,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는 뻔뻔스러운 태도에 대한 보도 등이 주를 이루었을 따름이다.

언론이 고 박지연 씨의 죽음을 다루고 있을 때조차 그 '젊은 노동자'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거대한 악당 삼성이 주인공이고, 박지연 씨는 순결한 희생자일 뿐이다.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고 외친 김예슬 씨가 언론에서 다루어질 때와는 사뭇 다르다.

박지연 씨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읽다보면 분명해진다. 우리 사회가, 우리 언론이 기대하는 '실천하는 20대', '사회의 부조리에 반항하는 젊은이'는 절대 노동자여서는 안 된다. 무조건 '대학생', 그것도 명문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어야 한다. 사실 박지연 씨는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었다. 다른 산업 재해 피해자와 함께 법원에 자신의 질병을 산업 재해로 인정해달라고 소송을 걸고 있었다.

박지연 씨는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박지연 씨를 '투쟁하는 20대'로 보지 않는다. 김예슬 씨의 자발적 퇴교는 '대학'이 아닌 '20대'의 문제로 받아들여지지만, 박지연 씨의 싸움과 죽음은 '20대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그에게 우호적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조차, 그것을 오로지 '삼성'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가령 4월 5일자 <한겨레>의 '왜냐면'에 실린 한 독자 의견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삼성 반도체 노동자 박지연 씨의 죽음은 삼성이 이 사회를 지배하는 방식과 노동자의 건강권의 문제와 그리고 우리 안에 자리잡은 '삼성'은 원래 그랬어,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을 드러내고 반성하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어야 한다."

4월 1일 발표된 민주노동당의 논평 역시 삼성에 대한 규탄이 주를 이루고 있다. 스물세 해를 살다 떠난 젊은이의 못다 핀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리 검색해도,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20대 담론'이 철저하게 대학생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례가 과연 또 있을까? 명문대에 다니는 대학생은 자퇴만 해도 화제가 되고 저항하는 20대로 승격된다. 고등학교만 나오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죽은 젊은이는 죽어서도 투쟁의 주체가 아닌 산업 재해의 희생자가 될 뿐이다.

김예슬 씨의 용감한 결의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현재, 세상의 시선은 대단히 불공평하다. '세상을 바꾸자'고 떠드는 바로 우리들의 시선이 불공평하다.

▲ 고 박지연 씨는 '삼성의 희생자'로 받아들여질 뿐 '투쟁하는 20대'였다는 사실은 망각된다. ⓒ프레시안(이상엽)

이렇듯 현재 논의되고 통용되는 '20대 담론'은 사실상 '대학생 담론'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20대 담론'의 의제가 '청년 실업 해소'와 '대학 등록금 인하'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각각의 중요성을 부인할 수는 없고, 두 측면 모두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20대의 삶과 인권이 피폐해지는 이유는 비싼 등록금과 대기업 사무직 취업난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박지연 씨의 죽음에서 확인할 수 있는 20대의 수많은 문제를 과연 '20대 담론'이 포용할 수 있을까?

앞서 말한 박지연 씨의 죽음도 그렇거니와, 가령 이번에 침몰한 천안함 사건을 되짚어보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대부분의 남성들은 군대에 간다. 그 군대는 지금 우리가 확인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권의 사각지대이며 누군가가 애꿎은 생명을 잃어도 속 시원한 해명 한마디 내주지 않는다.

도리어 생존한 장교들(그 중에는 다수의 20대 사관들이 속해 있다)에게 병원복을 입고 목발을 짚고 나오는 '쇼'를 강요한다. 20대 남성의 대부분이 저런 군대에서 2년간 청춘을 바치는 것이, 20대가 아파트가 없어서 모텔에 가야 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 아닐까?

그러나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20대 담론'은 저런 지점을 수용할 수 없다. 세대론의 덫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다. '386 세대가 20대의 몫을 가져간다'는 식의 괴담이 횡횡한 가운데, 정작 20대와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한국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그 운동의 과정에서 '20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사실상 실종되어버렸다.

대신 20대'를 위해' 등록금도 내려야 하고 아파트도 지어줘야 하고 낮은 학점을 받아도 대기업과 안정된 사무직 직장취직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주장들이 떠돌아다닌다. 전체 사회와의 접점을 찾지 못한 세대론은 결국 정부 혹은 권력자들이 배푸는 '시혜적 정책'에 대한 요구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러한 형태의 20대 담론은 점점 범사회적인 공감대를 잃어가고, '너희만 힘드냐?'는 식의 비아냥거림을 불러온다. 심지어 20대, 혹은 대학생 사이에서도 그러한 상호 불신과 냉소가 그득하다. 세상을 바꾸고 세상 속에서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내기' 위한 운동으로 스스로를 위치 짓고 있는 한 그러한 상호 불신과 전망의 결여는 필연적이다.

가령 우석훈 박사는 20대 미디어 <이빨을 드러낸 20대>와의 대담에서 "교수를 비롯한 교직원의 급여가 너무 과다하다는 것과 제2캠퍼스나 건물 신축투자되는 비용이 절약 가능하다"는 것을 근거로 "연간 등록금 100만 원 이하 책정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과연 이런 주장을 통해 대학을 변화시키고 개혁할 수 있을까? 교수와 교직원의 월급을 깎아서 대학생의 등록금으로 달라는 주장을 하면서 대학 사회 내에서 폭 넓은 공감과 정치적 동의를 확보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내 또래의 누군가는 아직 차디찬 서해 바다 속에 갇혀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린 나이에 백혈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그 속에서 청년 실업의 불안을 이야기하고 스펙 쌓기의 '무한경쟁'에 시달리는 고통을 토로하는 것을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20대 노동자가 죽어가고, 20대 군인이 학대당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20대 대학생이 '20대 문제'를 '등록금 인하'와 '청년 실업 해소'로 한정짓고 있다면, 부끄럽고 비도덕적인 일이다. 대학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듯, 대학생이 20대의 전부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기존의 '20대 담론'은 사회적 효용을 다해가고 있다.

김예슬 씨와 고 박지연 씨 모두를 위해, 이제는 그 폭을 좀 더 넓히고, 더 많은 주제를 함께 다루며 싸워나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할 때이다.

 


/노정태 전 <포린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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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태다미